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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단조로운 바퀴 소리, 덜컹거리는 사물들… 삶에 회의를 느끼고 충동적으로 올라탄 열차가 데려다준 도시 리스본. 경사진 골목길을 달리는 오래된 전차와 낯선 언어를 헤집고 만난 새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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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나만의 방. 내 집. 나는 이곳에서 살아 있다고 느낀다. 하루에 쌓인 불안을 털고 문을 닫으며 안도한다. 그래서 내가 ‘집돌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보니 아니다. 북해도의 눈 쌓인 거리를 홀로 걸어 보고 알았다. 말이 통하지도, 아니, 말을 나눌 사람이 없는 그 땅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다. 마음은 하얀 풍경처럼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 마음은 다시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치올랐다. 그저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은 걸까? 그러나 사람들을 만나보고 여러 모임에 나가 보니 그도 아니다. 혼자서 평온하듯이 함께여서 행복하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서로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은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아마데우와 그의 아버지는 끝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둘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대화가 단절된 세상은 슬프고 어둡다. 하지만 마음으로 통하기에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더 슬프다. 말이 불완전하다면 우리는 말로 무엇을 해야 할까?
삶은 남이 쥐여준 표를 들고 탄 기차 같다.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설령 그레고리우스처럼 베른으로 다시 돌아가도 곧 실망하리라. 지난 시간 속 풍경은 더 이상 그 풍경이 아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스쳐 가듯이 인생을 보낸다. 표에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쓰여 있다. 쉼 없이 달려서 도착하면 모두 끝나는 인생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끔 간이역에 내려 우동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기차를 기다려도 될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니까. 그렇게.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해도 늦게 도착했을 뿐이다.
삶에서 몇 가지는 선택할 수 있다. 아마데우도 많은 선택을 했다. 그는 죽어가는 독재자를 살렸다. 사람이 사적으로 사람을 단죄해도 될까? 그는 의사다. 환자를 차별 없이 구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진짜 비겁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혁명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아는 에스테파니아를 도망치게 해준다. 그가 품은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다수를 위해 개인의 희생하는 것이 옳을까? 훌륭한 선택이다. 그는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따랐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것도 많다. 내가 선택해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불안하다. 발 디딘 곳이 내일 무너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모래밭 같은 땅이라도 딛고 걷다 보면 앞으로 나아갈만하다.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은 선택할 수 없다. 이미 정해져 있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어째서 죽음이 불안을 낳을까? 불안 속에서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게 맞을까? 끝내 좌절하더라도? 아니면 차라리 내면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게 맞을까? 모르겠다. 어떤 삶을 택하든지 상관없을 것 같다. 살아가는 순간들이 빛난다면 살아볼 만하지 않나?
그레고리우스. 완전하지 않던 삶을 살던 그다. 책 한 권이 리스본으로, 이스파한으로 이끌었다. 말로 채우지 못하는 삶을 글이 구할 수도 있다.
불안의 서
포르투갈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불안의 서>. 짧으면 원고지 2~3매, 길면 20매 분량인 에세이 480여 편이 실려 있다. 어둠,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을 자신의 헤테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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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불안의 서도 그런 기록이 아닐까?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구하려는 작가의 노력.
처음에는 실존주의를 논하는 책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러나 작가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세상을 조금 관념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세상은 내 관념의 산물일까? 정말 내가 눈 감으면 사라지는 감각의 조각일까? 그렇다 해도 나는 내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도 실존한다고 믿겠다. 또한, 내 감각이 완전히 단절된다고 해서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그건 오만이 아닐까?
그러나 작가는 오만하지 않다. 그저 삶을 관조한다. 삶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나는 무엇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마 데우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끝없이 신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그저 일상을 살아간다. 작가는 자신을 치열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훔쳐본 작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치열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일상을 사랑한다.
그레고리우스도 마찬가지다. 때로 그의 삶은 지루해 보이고 불안해 보였다. 그레고리우스는 불안을 떨쳐내고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일상을 버리고 낯선 도시로 향했다. 나도 그처럼 한 번 리스본의 거리를 거닐어도 좋겠다. 그러면 나를 조금 더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일상에서 벗어나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불안은 계속될 것이다. 끝내 완전한 삶을 살지도, 온전한 나를 찾지도 못할지 모른다. 잠시 베른으로 돌아갔던 그레고리우스에게 익숙했던 광장이 낯설었듯이. 스스로 묻는다. 조금 더 나아진 내가 되고 싶지 않은가? 고집스럽게도 마음이 답하는 소리는 같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지금에 만족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엄청나게 지루하고 따분한 삶일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은 길을 후회하며 돌아볼지도 모르겠다. 그런 불안을 느끼면서도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삶에 감사한다. 지금은 불안보다 평온을 더 느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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