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의 고통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꿈의 서가/책 2018. 8. 16. 23:58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4203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79342&start=slayer
<인간은 왜 이리도 완전하지 않을까>
인간은 왜 서로의 감정을 완전히 나누지 못할까? 언어나 몸짓을 통한 의사소통은 오해를 낳는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만약 내가 세상의 모든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어땠을까? 아마 1분도 되지 않아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나는 신이 아니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고통을 다르게 나누는 것 같다.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오늘도 뉴스에는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모두 다 같은 인간의 죽음이다. 아니, 그러나 ‘나’에게는 서로 다른 죽음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내가 느낀 슬픔과 ‘당신’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끼는 고통은 다르다. 내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분명 다르다. 그렇다. ‘나’ 모두를 동등하게 대할 수 가 없다. 그래서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미군은 모병제를 선택한 나라다. 모병제 국가에서는 병사의 목숨을 아주 소중히 여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군대에 지원하지 않을 테니까. 따라서 미군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노력으로 최대한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살해하는 방법을 찾는다. 사람을 죽이는데 효율? 기가 막히지 않는가? CNN 기자가 미군의 저격수에게 사람을 쏘면 무엇을 느끼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는 대답했다. “반동이요”. 전장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별 일이 아니다.
종군 기자들은 이런 전쟁을 고발했다. 사진은 진실을 기억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은 보도 사진이다. 사건을 하나의 이미지에 담아 사람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각인한다. 후에 올 인류에게 “다시는 이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말라”고 당부를 남긴다.
사진은 진실만을 말할까? 회화는 작가의 의도를 담는다. 이에 비해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담는 것 같다. 그러나 사진 작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프레임에 세상을 담는다. 이미 현실은 편집되었다. 미국에는 흑인 노예의 역사를 다루는 기념관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선별된 것만 기억한다. 사람들은 사진을 맹신한다. 그래서 사진으로 남지 않은 사건은 떠올리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국가는 때로 사진을 이용해서 정의를 연출하고 선전한다. 전쟁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정치적 의도로 걸러진 현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포장된 것이 제국주의였다. 유럽의 열강은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고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진리를 만들었다. 작가는 미국에는 적대적이고 유럽에는 온건한 것 같다. 그러나 나치만이 유럽의 그림자가 아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유럽 국가는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착취했다. 정도가 다를 뿐. 그 때는 제국주의는 선이었다. 힘은 정의였다. 아직도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아직도 식민지였던 나라에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나라가 많다. 우리 옆 나라도 그렇고.
미국과 친구들은 정의를 표방한다. 남의 집안 싸움에 잘도 껴든다. 때로는 집안 싸움을 만들기도 한다. 정당한 싸움인지 모르겠다. 옆집의 부부싸움이 가정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가서 말리고 신고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가서 폭력의 주체를 때리는 것은 또 잘못 아니겠는가? 제일 고통받는 것은 죄 없는 자식들 아닐까? 누군가에게 위대한 성전에 죄 없는 시민들만 죽어간다.
<그래서 공감이란 게 뭔 가요>
우리가 고통을 담은 사진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충격과 공포를 소비하는 것일까?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깨닫고 경계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관음주의적 도착일까? 나는 무사하다며 안도하려고? 나는 행복하구나 위로 받기 위해서? 아니면 고통에 공감? 우리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께서 강제 징용을 당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고백하자면 나는 당시의 당신의 심정을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 때는 어렸다는 핑계를 대본다. 그래도 지금에 와서는 ‘전쟁은 잘못이라 말할 수는 있다’. 이제는 타인의 아픔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것이 진짜 공감일까? 그저 학습한 감정의 흉내가 아닐까?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일까? 공감이란 무엇일까? 오스카는 독특한 아이다. 내가 저 나이에 저 정도로 기발한 생각을 했던가 싶다. 그런 독특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아이. 그런 아이를 끝까지 이해하고 지켜보는 어머니, 할머니. 이런 것이 공감 아닐까? 나는 타인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다. 함께 하면 반이 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애초에 내가 느끼는 고통은 그 사람이 내게 준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일 뿐.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마도 내가 그 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내 왼손과 오른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만큼. 그 만큼의 사람만이라도. 오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더 이해하고 공감해야 겠다.
반응형'꿈의 서가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지 않는 (고도)처럼 (변사)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 대머리 여가수) (0) 2018.12.13 세 개의 관 + 소용돌이 (0) 2018.10.28 사장을 죽이고 싶나 + 요리사가 너무 많다(스포주의) (2) 2018.07.22 먼북으로 가는 좁은 길 + 댄스댄스댄스 (0) 2018.07.18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0) 2018.06.21